인간의 시각적 지각작용은 사진 기록에 의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선택적인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메라 렌즈와 인간의 눈은 모두 엄청난 속도로, 그리고 당장에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면전에서 이미지를 기록한다. 카메라는 해낼 수 있지만 눈 그 자체로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은, 그 사건의 외관을 그대로 고정시켜놓는 일이다.
- 존 버거, ‘본다는 것의 의미’

“천천히 커피 한 잔 하면서 얘기합시다. 커피는 몇 스푼이나…?”

필자는 10여년 기자 생활을 하면서 많은 인터뷰를 했지만 2008년 늦가을 전북대 화학과 최희욱 교수와의 인터뷰를 생각하면 지금도 미소짓게 된다. 그해 7월과 9월 연달아 과학저널 ‘네이처’에 빛수용체 단백질인 옵신의 구조를 밝힌 논문을 실으면서 주목받은 최 교수를 인터뷰하기 위해 전북대로 가면서 내심 부담이 됐다. 전화에서 들려오는, 약간 속삭이듯 하면서도 날카로운 느낌의 목소리에서 ‘까칠한’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화학과 건물이 고풍스러워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으로 연구실 문을 들어섰는데 정말 최 교수도 20년 전의 한 풍경처럼 커피와 프림, 설탕이 각각 담긴 통 세 개가 나란히 있는 선반으로 걸어가며 필자의 취향을 묻는 게 아닌가. 요즘은 에스프레스 머신을 갖다놓은 연구실도 많은데 커피믹스도 아니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라는 노래 가사처럼 초로의 학자와 40대에 접어든 기자, 왜소한 체구의 두 남자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이야기꽃(주로 연구 내용에 대해서라 꽤 드라이했지만)을 피웠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세 시간이 훌쩍 지나가 한 시가 넘었고 두 시 기차표를 예매한 필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얘기에 심취하다보니 점심 먹으러 갈 생각을 못했다며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는 최 교수에게 “나중에 전주에 또 오게 되면 그때 사주세요”라고 인사하고 연구실을 나섰다. 그 뒤 몇 차례 최 교수와 전화통화를 했는데 그때마다 “그때 점심도 못 먹이고 보내 너무 미안하다”는 말을 듣곤 했다.

그런데 최근 최 교수팀의 연구결과가 또 ‘네이처’에 실렸다(4월 22일 온라인판). 시각신호를 조절하는 아레스틴(arrestin)이라는 단백질이 활성화된 상태의 구조를 밝힌 것. 과학자들이 평생 한 번이라도 논문을 실어보는 게 소원이라는 NCS(‘네이처’ ‘셀’ ‘사이언스’) 저널인 ‘네이처’에만 무려 여섯번째 논문이다. 최 교수팀이 독일 훔볼트대 연구진과 공동연구로 밝힌 이번 연구결과는 이 글 앞에 인용한 소설가이자 미술비평가인 존 버거의 책 ‘본다는 것의 의미’의 한 구절에 대한 과학적인 주석이라고 할 만하다.

의미1. 사진을 보더라도 눈은 쉬지 않는다

최 교수팀의 이번 연구결과를 이해하려면 먼저 시각의 작동방식을 알아야 한다. 흔히 눈을 카메라에 빗대어 그 구조와 기능을 설명하는데 카메라의 필름(디지털의 경우 CCD)에 해당하는 게 망막이다. 망막에는 간상세포와 원추세포라는 빛을 감지하는 세포가 있는데 간상세포에는 로돕신(rhodopsin), 원추세포에는 아이오돕신(iodopsin)이라는 빛수용체가 존재한다. 최 교수도 그렇지만 주로 로돕신을 대상으로 시각신호 메커니즘을 연구한다.

세포막에 걸쳐 있는 빛수용체인 로돕신은 옵신(opsin)이라는 단백질과 레티날(retianl)이라는 색소분자로 이뤄져 있다. 수정체를 통해 빛이 들어오면 광자(photon)의 에너지가 레티날의 구조를 시스형에서 트렌스형으로 바꾼다. 그 결과 레티날을 둘러싸고 있는 옵신의 구조도 바뀌면서 로돕신은 메타로돕신II가 된다. 그러면 세포질쪽에 있는 G단백질이 활성화돼 시각신호가 신경계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런데 메타로돕신II는 빨리 로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G단백질을 활성화시키고 그 결과 뇌는 계속 빛이 있다는 시각신호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불빛이 잠깐 반짝했는데 뇌는 불빛이 계속 있는 걸로 보게 된다는 말이다. 이래서는 빛의 파장과 세기가 바뀌며 전개되는 일상의 광경(동영상)을 재현할 수도 없다.

물론 인체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조처를 해놨다. 빛에 의해 활성화된 메타로돕신II는 G단백질과 결합하여 시각신호를 전달하는 반응을 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부분에 인산기라는 조각이 붙는다. 한편 세포 안에는 아레스틴이라는 단백질이 있는데 아레스틴은 인산기가 붙어있는 메타로롭신II를 만나면 찰싹 달라붙어 더 이상 G단백질을 활성화시키지 못하게 만든다. 일단 시각신호전달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만든 것이다.

그 뒤 아레스틴이 붙어있는 메타로돕신II는 일련의 반응을 거쳐 로돕신으로 재생돼 다시 빛을 감지할 준비를 한다. 이 모든 과정이 불과 1밀리초 이내에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미지의 변화가 없는 사진을 1초 동안 보고 있을 때조차 시각계는 디폴트로 ‘로돕신->메타로돕신II->로돕신->메타로돕신II->…’의 사이클을 무려 1000회나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낭비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동영상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동물에게 고정된 영상에 효율적인 별도의 시스템이 진화했을 리는 없다.

2000년 생체분자의 입체(3차)구조를 알 수 있는 X선 결정학 방법으로 로돕신의 구조가 처음 밝혀진 이래 활성화된 형태의 옵신(메타로돕신II에서 레티날이 빠져나간 상태), G단백질, 아레스틴 등 시각정보전달에 관여하는 분자들의 구조가 속속 밝혀졌다.

흥미롭게도 아레스틴 단백질 역시 평소에는 비활성화된 구조로 세포 안에 존재하다가 인산기가 붙은 메타로돕신II를 만나면 단백질의 일부가 잘려나가면서 구조가 바뀌어 활성화되면서 메타로돕신II에 딱 달라붙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고된 여러 아레스틴 구조는 모두가 비활성 상태의 구조였다.

이번 논문에서 최 교수팀은 인산화된 메타로돕신II와 결합할 수 있는 활성화 직전단계의 아레스틴 변형체의 3차 구조를 밝혔다. 아레스틴이 활성화된 메타로돕신II와 결합해 시각신호전달을 멈추게 하고 메타로돕신II를 로돕신으로 재생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된 것이다.

사람의 망막은 필름처럼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되는데(눈을 떴을 때 첫 광경이 사진처럼 찍혀 고정되면 안 되니까!),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아레스틴인 셈이다.

의미2: 눈이 아니라 뇌가 보는 것인가
감각에 대해 얘기할 때 유의해야 할 부분이 감각(sensation)과 지각(perception)의 구분이라고 한다. 즉 감각기관인 눈은 시각정보를 받아들이는 곳이지 실제로 보는 건 뇌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눈을 감고 자는 꿈에서 생생한 영상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이게 다일까. 지각은 감각 정보를 처리한 뇌의 결과물을 우리가 ‘의식’했을 때, 즉 ‘봤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다. 만일 어떤 시각 정보가 우리의 의식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했을지라도 몸의 생리에 영향을 줬다면 우리 몸(무의식의 뇌 포함)은 어쨌든 그 빛을 봤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일주리듬을 주관하는 뇌의 시각교차상핵(SCN)을 연구하고 있던 미국 브라운대 신경과학과 데이비드 베르슨 교수는 어느 날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2000년 생쥐와 사람의 망막에서 멜라놉신(melanopsin)이라는 새로운 옵신 단백질이 존재함을 밝힌 연구결과였다. 참고로 멜라놉신은 1998년 개구리의 피부세포에서 처음 발견됐다.

망막은 3개의 층으로 이뤄져 있는데 수정체를 통과한 빛이 처음 지나가는 가장 안쪽에 신경절세포층이 분포하고 그 다음에 내핵층이, 그리고 맨 바깥인 외핵층에 간상세포와 원추세포가 분포한다. 옵신이 구성성분인 로돕신과 아이오돕신이 빛을 감지한 간상세포와 원추세포가 내보낸 신호는 내핵층의 세포를 거쳐 신경절세포로 전달된 뒤 뇌로 이어진다. 그런데 생쥐의 신경절세포 가운데 약 2%에서 멜라놉신이 발견된 것. 이는 이 신경절세포가 제3의 빛수용세포임을 시사하는 결과였다.

베르슨 교수는 시각을 상실한 생쥐나 사람도 일주리듬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주리듬은 하루 24시간 주기에 따라 몸의 생리가 바뀌는 현상으로 그 신호는 낮과 밤의 변화, 즉 빛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경절세포의 멜라놉신이 빛수용체이고 그 신호가 시각교차상핵으로 전달돼 일주리듬을 갖게 된다고 가정했다. 그리고 역행운송이라는 실험방법을 써서 이를 멋지게 증명했다.

2002년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에서 베르슨 교수는 멜라놉신이 있는 신경절세포를 ‘광민감망막신경절세포(ipRGC)’라고 명명했다. 제3의 빛수용세포의 존재가 확인됨에 따라 기존 광수용세포가 고장나 시각을 상실한 사람도 일주리듬을 유지하는 현상이 명쾌히 설명됐다. 추가 연구 결과 ipRGC는 일주리듬 뿐 아니라 빛의 양에 따라 홍채의 수축과 이완을 조절하는데도 관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멜라놉신이 빛 가운데서도 파장이 짧은 파란빛(480나노미터(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미터)에서 가장 민감)에 반응한다는 사실도 발견됐다.

의미3: 옵신이 없어도 보고 옵신이 있어도 못 본다
최근까지도 과학자들은 동물에서 빛의 신호는 옵신 단백질을 통해서만 이뤄진다고 생각됐다. 그런데 지난 2011년 ‘사이언스’에는 초파리가 옵신이 아닌 크립토크롬이라는 단백질을 빛수용체로 이용해 빛의 신호를 일주리듬 조절에 이용한다는 연구결과가 실렸다. 크립토크롬은 파란빛에 반응해 외부환경의 변화에 맞춰 일주리듬을 재조정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크립토크롬 유전자가 고장난 초파리는 시차가 바뀌어도 몸이 적응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한편 지난 2012년 ‘셀’에는 초파리의 더듬이 세포에 존재하는 옵신이 빛이 아닌 소리의 정보를 전달한다는 연구결과가 실렸다. 옵신이 청각기관 내 기계적 자극을 감지하는 세포에서 수용체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역시 초파리에서 옵신이 온도를 감지하는 역할을 함을 시사하는 연구결과도 있다.

초파리 애벌레는 18°를 제일 좋아해 19°에서 24°의 온도차가 나는 곳에 두면 19도 쪽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ninaE라는 옵신 유전자가 고장난 초파리 애벌레는 이런 행동을 보이지 않았던 것. 이 돌연변이체에 쥐의 멜라놉신 유전자를 넣어주자 애벌레는 다시 최적 온도를 찾아가는 행동을 보였다. 옵신이 주변 온도를 감지한다는 강력한 증거다.

결국 옵신은 시각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빛수용체로 특화된 단백질이 아니라 다양한 양식의 외부 감각 정보를 수용하는 단백질로 등장했고 진화를 거쳐 빛 정보에 특화된 다양한 옵신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여년 사이 시각신호 전달에 관한 연구결과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시각의 의미가 업데이트되고 있다. 문득 ‘본다는 것의 의미’에 있는 존 버거의 글귀가 떠오른다.

“의미라는 것은 이해하는 기능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인 것이다.”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